Miscellaneous (한 + Eng)

새해

Author
chloebringsjoy
Date
2020-01-08 11:35
Views
544
(2019. 12. 30)

겨울이다. 누구 말마따나, 외로움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겨울이었다. 구하라, 설리가 죽었다. 이상하게 2세대 아이돌을 보고 있노라면 갖가지 생각이 든다. 아직 철 없어도 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어이 재빠른 속도로 어른이 되었고 사람들은 환호하며 그들을 어른으로 대했다. 결국 그런 산업 구조가 한 때 차트 1위를 휩쓸던 이들의 자살, 무한한 인스타그램 라이브, 그리고 안준영과 김용범의 구속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니 기묘하다. 이런 이야기를 꺼낼 때, 그런 일은 항상 시답잖게 일어나는 것이라며 한 마디를 꼭 거드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의 그 말은, 조금 경멸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누가 죽었대. 누가 죽었다고 하더라. 그 사람은 결혼했다던데. 누구랑?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장례식을 가고 결혼을 축하해주는 것이 한국 어른의 중요한 덕목이라는데, 죽음과 결혼이 동일선상에서 이야기되는 우스꽝스러운 자리들이 이제는 익숙하다. 그렇지만 말하는 사람들 모두가 비슷한 ‘경전’을 참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버릴 수 없다. 예컨대, 대중은 “영화 겟아웃에 숨겨져 있는 열 가지 비밀”을 알고 싶어하고, “영화 겟아웃에 숨겨져 있는 열 가지 비밀”을 말하는 유튜브 계정도 몇 천 개가 넘어가는데, 정작 그 비밀이란 영화 예고편, 감독 인터뷰, 나무위키 정도를 조합해 보면 알 수 있는 정보가 전부일 때.

결국, 대중에게 적절한 지침을 제공해 온 ‘지성’이 얼마나 될까 떠올린다. 정치, 사회, 경제, 언론, 아무튼 이름 거창한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라 일컬을 수 있는 사람들 중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의 취업난, 인구절벽, 한반도 분단을 설명 – 해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 해줄 백종원, 강형욱, 이사배, 강성태가 있나? 오히려 지금은, 이청준 식으로 말하자면, 동상을 부서뜨리는 것이 새로운 동상인 시대다. 인류에 대한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찼던 19, 20세기 근대라면야 맹목적인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는 게 굉장한 훈장이었겠지만, 지금은 트위터나 워크맨 식의 약삭빠른 시니컬함이 우선이다. 더불어민주당이나 자유한국당 그 어느 쪽도 지금 세대를 온전히 대변해주지 못하고, 사회주의나 자유주의는 일종의 패션 아이템이 되어버렸으며, 나의 이상을 실현해줄 곳이 아니라 꼰대/부머들이 없는 직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니까.

봉준호가 생각난다. 그는 레이트 나이트 쇼에 나가 자신이 젊었을 때 했던 과외 ‘썰’을 (때로는 통역가를 거쳐, 때로는 여유로운 자기만의 영어로) 소탈하게 이야기하지만, “오스카는 결국 미국의 시상식”이라고 일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몇 달 전, 기생충을 보고 난 희경과 그런 얘기를 했었다. 봉준호가 희망적인 결말을 내지 않은 게 좋다고. 공정한 경쟁이라는 말이 어느 다단계 회사 포스터에 붙어있는 구호인 마냥 원색적으로 느껴지고, “라떼는 말이야” 같은 문장을 되풀이하면서 행복회로를 돌리는 사람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 같은 감독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봉준호가 아닌 최우식으로 둠으로써- 여전히 “돈을 많이 벌어” 아버지를 찾겠다고 말하는 철없는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마지막 희망 한 가닥을 남겨두었다고.

기생충이 아닌 조커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더욱 많은 조명을 받는다면, 그것은 정말 조커가 미국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영화 조커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지점은 결말 장면에 등장하는데, 영화에서 나름대로 절실히 묘사하려고 애쓴 갈등들이 마치 뮤지컬 넘버 하나가 끝나듯 종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커에 등장하는 수많은 ‘애환’은 장난이 아니고 현실이다. 조커가 내뱉는 문제의식에 실제 발 디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조커는 영웅도, 빌런도 아닌 그저 장난꾸러기에 불과하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잭 니콜슨 식 빌런도 아니고, 히스 레저 식 안티히어로도 아니라는 점에서 독창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회에 그 어떤 새로운 질문도 던지지 못한 채 빛 속으로 사라진다.

돌아보자면, 최근 몇 년 간 우리는 수많은 악행들이 ‘장난꾸러기’가 벌이는 난투극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너무 많이 들어왔다. 왜 인권위법에 성적 지향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을까? ‘편견에 찌든’ 기독교인들이 반대를 했나 보지. 왜 서초동, 광화문 나눠서 시위를 하는데 정작 나는 거기서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까? ‘극단적인’ 사람들 일부가 시끄럽게 도로 막고 서 있으니까. 왜 남자들은 곰탕집 추행 사건에 그렇게도 분노하는 걸까? 자기네들밖에 생각 안 하는 ‘여혐충’들이니까 그렇지.

모든 문제들이 편견, 무지, 여성혐오 등의 소산이라고 말하지 않는 해답을 찾고 싶다. 누군가의 수치심, 무력감, 그리고 죄책감이 그저 일탈로 치부되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법안은 통과되었고, 지지난주부터 수영을 다시 시작했고, 나는 곧 학위논문 프로포절을 해야 한다. 2020년이 오고 있다.